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메르 제국 (문단 편집) === 건국 === 크메르 제국의 역사는 790년 자바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자야바르만 2세'''가 자바의 공주와 결혼하고, 자바 왕실의 신임을 얻어 자바의 대리인 자격으로 수진랍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자야바르만 2세는 캄보디아 남동부 해안 지역에서 시작해 점점 북서쪽으로 뻗어나갔고, 결국 세력을 키워 분열되었던 영토를 통합해내기에 이르렀다. 790년에는 앙코르에 작은 소왕국을 세우고, 수도를 [[톤레삽 호수]] 인근의 '''마헨드라파르바타'''로 삼아 근거지를 마련했다. 이후에도 왕국의 세력 확장을 거듭하던 자야바르만 2세는 세력을 충분히 키운 802년 자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을 '군주들을 지배하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의미의 '''데바 라자''', 즉 '''신왕'''(神王)으로 선포하며 크메르 제국을 세웠다.[* 학계에서는 자야바르만 2세가 [[제정일치]] 사상과 신왕 제도를 자바 왕실에서 배워왔다고 여긴다.] 자야바르만 2세는 여러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크메르 제국의 정복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야바르만 2세는 수도를 마헨드라파르바타에서부터 '''하리하랄라야'''로 천도하며 변방 민족들에 대한 정복을 가속화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외치 확장에 신경을 쓰던 자야바르만 2세는 835년 세상을 떠났다. 자야바르만 2세의 뒤를 이어 신왕위에 오른 '''자야바르만 3세'''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877년에 붕어했고,[* [[코끼리]]를 사냥하며 쫒다가 죽었다는 말이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인드라바르만 1세'''가 즉위했다. 877년 즈음에 즉위한 인드라바르만 1세는 외치와 동시에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했다. 당대 기준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수로를 짓는가하면[* 이는 훗날 후대 국왕들이 더 거대한 수로와 저수지들을 마구 지어대며 빛이 바랬다. 게다가 지금은 기후 변화로 저수지가 말라버려서, 몬순 기간에도 약 750만 입방미터 정도의 물만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선왕과 신들에게 화려한 사원들을 봉헌했다.[* 인드라바르만 1세가 지은 사원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건 '''바콩 사원'''이다. 힌두교의 성스러운 메루 산을 형상화한 독특한 탑 형태 신전의 원형으로 훗날 앙코르 사원들의 기본이 된다.] 이는 건설 사업을 통해 노동력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왕가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인드라바르만 1세가 889년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인 '''야소바르만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야소바르만 1세는 기존 수도인 하리하랄라야를 떠나 신도시이자 앙코르의 첫 번째 도시였던 '''야소다라푸라'''를 세워 천도했다. 야소바르만 1세가 굳이 수도를 옮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리하랄라야는 이미 선왕들이 세운 사원들로 가득 포화된 상태로 더 이상 새로운 건물을 축조할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고, 이는 새 왕들의 왕권 강화에 심각한 악재였던 탓이 컸다. 뿐만 아니라 야소다라푸라가 위치한 앙코르는 톤레삽 호수와 프놈 쿨렌 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씨엠립 강으로부터 빠르게 물산을 바로 바로 공급받을 수 있었다. 여러 모로 하리하랄라야보다 훨씬 매력적인 수도였던 셈이었다. 야소바르만 1세는 앙코르 한복판에 있던 60m의 언덕에 높다란 사원을 세웠고, 길이 7.1km x 1.7km의 거대한 저수지를 지어 물을 공급하기까지 했다. 야쇼바르만 1세가 붕어하자 '''하르샤바르만 1세'''가 새 왕이 되었다. 허나 하르샤바르만 1세의 치세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기껏해야 13년 정도 밖에 재위하지 못했고, 그의 뒤를 이은 동생 '''이샤나바르만 2세''' 역시 몇 년도 못가서 왕위의 불안정으로 쫒겨났다. 이샤나바르만 2세를 쫒아내고 새 왕으로 즉위한 인물은 인드라바르만 1세의 손자였던 '''자야바르만 4세'''라는 인물이었다. 서기 928년부터 941년까지 꽤나 오랜 기간 동안 크메르 제국을 통치했다. 자야바르만 4세의 최대 업적은 앙코르 북동쪽 100km 정도 떨어진 '''코 케''' 지방에 새 수도를 세워 천도한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이 무너져 폐허만이 남아있지만 당시에는 앙코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멋진 도시들 중 하나였다. 자야바르만 4세는 941년 경에 붕어했고, 그의 어린 아들이었던 '''하르샤바르만 2세'''가 잠시 왕위를 차지했지만 3년 만에 사촌인 라젠드라바르만 2세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쫒겨났다. [[파일:banteay srei temple.jpg]]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들 중 하나로 꼽히는 '''반테이 스레이 사원'''. 현재는 [[씨엠립]]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활발한 정복 군주였다. 그는 즉위 직후 앙코르로 수도를 재천도했고, 사원들을 신축하는 등 수도 재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지방 영주들의 느슨한 조합에 불과했던 크메르 제국을 더욱 중앙집권화시키는 데 힘을 쏟아 국왕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려고 시도했으며, 950년 경에는 동쪽에 있는 최대 경쟁국인 [[참파]]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968년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붕어하자 그의 10살난 아들인 '''자야바르만 5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자야바르만 5세 치세의 크메르 제국은 번영을 이룩했다. [[불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평화를 중시하는 풍조가 널리 퍼졌고, 예술가들과 학자를 떠받들어주었던 덕이었다. 자야바르만 5세는 수도 서쪽 근교에 '''자옌드라나가리'''라는 이름의 궁전을 세워 거기서 머물렀고,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 하나로 꼽히는 '''반테이 스레이 사원''', 자신을 위해 세운 '''타 케오 사원'''[* 참고로 이 타 케오 사원은 처음으로 전체가 [[사암]]으로 만들어진 사원이었다. 그러나 공사 도중 낙뢰를 맞아 악마를 퇴마하는 작업을 치렀지만 결국 끝끝내 완공하는데 실패했다.] 등을 연달아 세우며 크메르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40년 가까이 크메르 제국의 안정기를 이룩한 자야바르만 5세는 1001년에 붕어했다. 명군이었던 자야바르만 5세가 죽자 크메르 제국도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가 죽자마자 3명의 후계자들이 동시에 왕위를 주장하면서 제국이 사실상의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수리야바르만 1세]]'''가 겨우 내전을 봉합하고 유일한 왕으로 즉위하면서 다시 안정을 찾았다. 1010년 크메르의 유일한 국왕으로 등극한 수리야바르만 1세는 저 먼 남인도의 [[촐라 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인근의 탐브랄링가 왕국[* [[말레이 반도]]에 위치한 인도계 소왕국. 1001년에는 [[송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냈고, 전성기에는 [[스리랑카]]를 침공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13세기 경에 태국의 [[수코타이 왕국]]에 병합되어 멸망했다.]이 크메르 제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에 저먼 촐라 제국의 힘을 빌려서 탐브랄링가 왕국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크메르가 촐라와 접촉한 걸 깨달은 탐브랄링가는 반대로 [[스리위자야]] 제국의 힘을 빌려 크메르 제국을 견제하려 들었다. 결국 크메르-촐라 연합군과 탐브랄링가-스리위자야 연합군이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에서 크메르-촐라 연합군이 대승했다. 전쟁은 크메르 제국의 동남아 패권 장악으로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함께 싸운 크메르-촐라는 [[불교]]계였고, 이에 맞서 싸운 탐브랄링가-스리위자야는 힌두교계였기에 종교전쟁의 의미도 있었다. ] 수리야바르만 1세는 탐브랄링가 왕국과 스리위자야 제국을 몰아낸 이후에도 끊임없는 반란 징조에 시달리면서 40년 가량을 버텼다. 그렇게 수리야바르만 1세가 아슬아슬하게 버티다가 1050년에 붕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가 새 왕으로 즉위했다.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는 약 16년 간 재위했지만 '''바푸온 사원'''을 건설하고 반란을 한 번 진압한 걸 제외하면 별 업적은 못 남겼고, 1066년 그의 남동생이었던 '''하르샤바르만 3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하르샤바르만 3세와 그의 후계자였던 '''자야바르만 6세''', 그리고 그 후계자인 '''다란인드라바르만 1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딱히 없다. 이 시기 참파와의 전쟁에다가 [[송나라]]와의 충돌, 그리고 내전 때문에 워낙 흉흉한 시절이라 제대로 남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하르샤바르만 3세와 그 후계자들은 제대로 된 업적을 남기지도 못한 채 내전들을 진압하느라 진을 빼야만 했고, 이같은 혼란상은 명군인 [[수리야바르만 2세]]가 등장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